탈무드에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마을에 머리가 둘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시간이 한 참 지나 동네 사람들이 갑자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몸은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면 이 아이는 한 명일까 두 명일까 아무리 논쟁을 해도 해결이 나지 않고 회당의 랍비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뜨거운 물을 한쪽 머리에 부어보라 만약 다른 쪽 아이도 함께 비명을 지른다면 한 명이고, 아무렇지 않으면 두 명이다. 사랑 없는 공동체는 가짜입니다. 합리적 근거와 추론, 명백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라할지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런 필요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야 말로 모든 가짜를 대체하는 진짜이며,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12~14에는 가정, 교회, 사회 등의 공동체가 온전하게 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더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내게 시간이 없고, 내게 맞지 않으며, 내가 잘 못하는 것이라도 상대방을 위해 시간을 내고, 함께 해 보고,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전화를 받을 때 마다 “고객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듣게 되고, 노래가사의 70~80%가 사랑이야기 이며, 야단을 치거나 상대방을 괴롭히는 일도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라는 말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하고 노래하고 표현해도 상대방을 용납하는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고, 사랑으로 인식되기는커녕 이기적인 모습과 괴롭힘으로 각인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용납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시간이 걸리고 내가 힘이 들어도, 확실하게 나의 사랑을 각인시키고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느낄 수 있는 사랑,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랑을 하기 위해 용납하는 사랑을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무익한 종 박희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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