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칼럼

[칼럼] 당돌한 성도

주세움교회 2018. 8. 10. 13:03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안치한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를 마가복음에서는 당돌한 요셉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5:43) 여기서 당돌하다는 버릇이 없다거나 엉뚱하다는 뜻이 아니라 용기내다라는 뜻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부자요,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도왔다가 자신의 체면과 명성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청한 행동은 용기 없이는 안 될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을 모심을 통해 그동안 감춰져 있었던 그는 드러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교회에서 인정받고 존경받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어떨 때 용기를 내어야 할까요?

첫째로 [옳은 일]에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마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장례했다는 것(19:40)을 볼 때,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장례를 치웠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기 위해 예수님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이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게 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릎 쓰고 용기를 내었던 것입니다. 둘쨰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는 부자였을 뿐 아니라 존경받는 공회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돈이 많다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평소 유대지도자들과 로마인들 사이에서 존경받고 신뢰가 두터웠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인근에 자신을 위해 파 두었던 새 무덤을 예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은 희생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용기가 예수님의 시신을 지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치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는 기독교의 부정과 실수를 근거로 무차비한 공격을 퍼 붓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고, 평소 준비되어 옳은 일에는 당당하게 솔선수범함으로 나서서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무익한 종 박희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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