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주안에 우린 하나
요한복음 3장에는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서 세례를 베푸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도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세례를 받기 위해 다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예수님은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왜 계속 세례를 베푼 것일까요?
그것은 세례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사명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넘게 굳어진 유대인들의 마음을 회개를 통해 부드럽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죄 용서함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확증하는 [구원의 세례]였던 것입니다. 같은 세례라도 목적과 사명이 달랐기에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목베임을 당하기 전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인 회개의 세례를 계속 행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잘 하는 것은 남들도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일수록 남들도 자신과 같이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을 가지고 부모는 자녀를 가르치고, 사장은 부하직원을 닦달하며, 교회 성도들 간에도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가정, 직장, 교회는 하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차이와 각자가 맡은 사명의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심지어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 가정, 직장, 교회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내가 속한 공동체의 하나됨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두가 나처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저 사람, 저 상황을 주신 것은 다 이유가 있을거야.’라고 생각하며 서로를 존중하여 진정한 하나됨과 행복을 이뤄 가시길 바랍니다.
-무익한 종 박희재 목사-